기회 1 – 중학생
위 글에 뒤이어.
2. 고등학생
한국으로 돌아와 엄마 카페에서 일했다.
일하는 틈틈이 혼자 공부했다.
수능 모의고사도 쳐봤는데 언어는 6등급이고 수학은 2등급이고 영어는 4등급인가 그랬다.
수능으로는 내가 원하는 대학을 갈 수 없다는 판단이 섰다.
나에게는 수시 밖에 없었다.
아포스티유 받는 것도, 지원할 수 있는 학교를 찾는 것도, 대입 자소서도 꾸역꾸역 해냈다.
운이 좋게 유니스트 최종 면접까지 붙었다.
면접에서 두 문제가 나왔다.
하나는 보자마자 쉽게 풀었고 나머지 하나는 문제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알아듣지 못한 한글 단어가 있었고 그걸 구하래서 못 구했다.
대충 그 문제에서 구할 수 있는 값들을 몇 개 구해서 대면면접에 들어갔다.
면접은 기세라고 생각했고 화이트보드에 풀이를 우다다 적었다.
앉아계신 교수님들 눈에 물음표가 떠도 어쩌라고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러다 한 교수님께서 그거 아닌 거 알죠라며 먼저 말을 걸어줬고,
문제를 이해 못 했다고 혹시 영어로 말해줄 수 있냐 여쭸다.
그렇게 힌트를 얻어서 풀어서 보여드렸지만 당연히 떨어졌다.
끝도 없는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기분을 또다시 느꼈다.
왜냐하면 이것보다 더 최선을 다할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절망스러워서 절에 기도하러 다녔다.
어느 날 엄마 카페에 면접관이셨던 교수님이 찾아왔다.
면접 때 학교 안 가면 뭐 하냐고 묻기에, 첨성대 앞 카페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었는데, 그걸 기억하고 찾아오셨다.다른 교수님들을 설득해서 나를 붙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하셨다.
게다가 내가 다른 대학에 가거나, 다시 유니스트에 지원해 합격하게 되면 꼭 본인을 찾아달라 하셨다.
라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암울의 시기였어서 그런지 기억도 우울하게 바꿔버렸나보다.
그 교수님은 내가 합격한 줄 알고 본인 연구실로 데려가기 위해 오신거였다.
혹시 다른 학교에 가게 된다면 석사는 자기 연구실로 왔으면 좋겠다고 엄마에게 말했다고 한다.
교수님의 이야기 끝에 불합격 소식을 전했더니 상심하셨다면서…
엄마가 이야기를 정정하라고 알려주셔서 수정해둔다.
학교에 있는 대신, 카페에서 일하고 있는 청소년에게 세상은 다정하지 않았다.
우리 집 사정을 아는 사람들이야, 당연히 나를 딱하고 어여삐 여겼지만, 그들은 소수였다.
무수히 많은 손님들 중에 다정했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무시가 담겨있는, 또는 숨기려 하던 그 눈초리들을 아마 나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를 너무 함부로 대하는 사람 앞에선 한국말을 일부러 어눌하게 했다.
금세 눈빛이 달라지며 나의 사연이 궁금한 듯 은근히 말을 걸어오곤 했다.
그렇게 한순간에 바뀌는 태도도 역겨웠다.
무시의 눈빛 속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란 두려움이 짙어질 때,
나를 보러 왔던 그 교수님이,
그 사실이 내 어깨를 추켜세워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