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 2 – 고등학생
위 글에 뒤이어.
3. 대학생
카페에서 일하면서 인생을 배웠지만 병도 얻었다.
쉬는 날 하루 없이 오전 8시부터 저녁 10시까지 매일 영업을 했다.
어느날 갑자기 픽 하고 쓰러졌고, 이후로도 종종 쓰러졌다.
한동안 원인불명이다가, 한날 응급실에서 명의를 만나 이석증임을 알게 됐다.
안타깝게도 이석증은 난치병이라, 달갑지 않은 평생 친구가 생겼다.
더 이상 카페 일을 하지 않게 되었을 때도 일 년에 한두 번은 꼭 쓰러졌다.
대학을 타지로 가게 되어 기숙사에 있었을 때는 친하지도 않았던 동기한테 죽 좀 사다 달라고 부탁할 정도였고,
자취 할 때는 상비로 죽을 구비해놨다.
이석증의 가장 큰 문제는 정확히 언제오는지 모르고, 정확히 언제 낫는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누워서도 소화시킬 수 있는 음식이 필요했다.
내가 다닌 학과는 졸업을 하기 위해서 선배들의 졸업작품에 필수로 스탭 활동을 해야 했다.
보통 짧게는 4-5회차 촬영이 있고 길게는 몇 달씩 기획부터 참여를 해야 했다.
1학년 때 참여한 두 작품 모두 3회차에 이석증이 와서 도중하차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고생은 끽해야 이틀이었던 것이다.
참여했다고 서명을 받아야 했지만, 도중하차를 했으니 선배들이 대타도 급하게 구했어야 했고, 면목이 없어 참여 확인서를 받지도 못했다.
1학년 때부터 영화 일로 밥 벌어먹고 살지는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이후로도 이석증으로 누워있을 일이 생겼고 사람들은 영문도 모르고 펑크를 맞았다.
이석증을 설명할 방법도 없고 컨디션도 안 좋으니 대충 아무 말로 뭉개고 넘어갔는데 두고두고 미안한 현장들이 몇 있다.
2학년때부터 국가장학생으로 학교 재단에서 일하게 됐다.
사무직이 꽤 적성에 맞았다.
사무실에 계신 선생님들도 다 좋으신 분들이어서 그런가 일도 재미있었다.
열심히 한 만큼 중요한 업무도 맡게 해주셨고 최선을 다했다.
국가장학생으로는 한 달에 일할 수 있는 시간이 한정적이었다.
나의 일솜씨가 마음에 드셨던 국장님께서는 국장으로 일하는 대신 풀타임으로 고용해 주셨다.
학기 중엔 수업 시간도 배려해 주셨다.
나도 최대한 6시 이후 수업 또는 오전 수업으로 배치해서 학업보다는 재단일에 더 집중하는 방향으로 학부 생활을 보냈다.
어차피 이석증 때문에 현장일은 못할 것 같고, 사무직을 해야 하면 예대 졸업생을 뽑아줄 회사도 없을 것 같으니, 이렇게 실무를 하면서 배우는 게 훨씬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3년 반을 끝으로 재단일을 마무리하면서 국장님이 해주신 말씀이 있다.
너가 너무 예뻐서 재단에 붙잡아두고 싶은데, 더 큰 물에서 놀아야 하는 애니까 보내주는 줄 알라고 했다.
선생님들이 백화점 데리고 가서 정장도 맞춰주셨다.
졸업 후 한창 방황할 때도, 이후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도, 국장님의 말을 되뇌었다.
그리고 그때 배운 것들을 아직까지 써먹으면서 살고 있다.
–
기회에 대해 이야기하며 떠오른 세 시절의 절망을 처음으로 복기해봤다.
한 해 한 해 마음에 여유가 쌓이면서도, 그때를 뒤돌아 볼 여유는 없었다.
여전히 여유가 충분하진 않지만, 기왕 되짚어 본 것을 정리해서 남겨놓고 싶었다.
언젠간 세 절망 사이의 시간도 되돌아볼 수 있을 만큼 강해지면 좋겠다.
시간이 흘러 요 며칠간 남긴 글을 다시 읽게 되다면, 어떤 부분을 고치고 싶어지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