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에 입문했을 때, 시그니처 향을 얼른(?) 찾아서 평생 그것만 뿌리고 다니겠다는 일념으로, 모든 향수 코너를 다니며 시향 했었다.
향수는 까탈스럽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있으면 갖고 싶지가 않다.
화장품은 샘플을 받으면 안 쓰던 걸 써볼 수 있어서 기쁜 마음이 드는데,
향수 샘플은 누구 주기엔 멋쩍고 디퓨저로 만들기엔 양이 적고 그렇다고 버리긴 아깝고 어떻게 처분해야 할지 고민이 된다.
마음에 드는 향수를 만나는 건 운명적인 일이다.
올 겨울에 꽂혀 아직까지 뿌리는 향수는 아쿠아 디 파르마에서 나온 미르토 디 파나레아다.
르라보의 베이와 섞어 뿌리면 가장 좋고, 그냥 뿌려도 무난하다.
백화점에 가면 주로 1층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시향지를 들고 서있는 직원을 마주칠 수 있다.
넉살 좋게 시향지를 건네면 흔쾌히 받아들고, 멀리 쭈뼛거리고 있으면 다가가서 달라고 한다.
이제는 마음에 드는 향을 찾겠다고 향수 코너를 돌다가는 현기증이 나서 쓰러질지도 모른다.
1층 시향지를 받아드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다.
이 날도 운동화를 사러 갔다가 1층 시향지를 받아들었다.
뿌리자마자 나는 향이 좋아서, 바로 30ml짜리로 사볼까 하다가, 잔향까지 확인하고 사야겠다고, 신중을 기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도, 시향지에서 향이 사라질때까지도, 계속 좋았다.
마침 데일리 향수를 찾고있었는데 딱이었다.
일주일 뒤, 시향지에 적힌 브랜드의 매장을 찾아갔다.
매대에 나와있는 향을 맡아보는데 같은 향이 없었다.
3년 만에 마음에 드는 향을 만났건만 이번에 놓치면 또 몇 년 만에 만날 수 있으려나.
다른 군의 제품이었다면 절대 그러지 않았겠지만 향수는 다르다.
직원분에게 가서 설명을 드렸다.
일주일 전 1층에서 나눠주던 시향지의 향을 사러 왔다고 하니,
서랍에서 장부를 꺼내셔서 날짜를 훑으며 향을 찾아 주셨다.
날짜와 시간별로 다른 향을 쓰고 있어서, 당일 사용했던 향과, 내가 설명한 향의 특성을 조합해 후보를 두세 개로 추렸다.
그리고 찾았다!
이 향수는 한여름에 어울리는 향수라고 소개되어 있다.
나는 겨울에 만나서 그런가.
날이 살짝 차가울 때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마침 요즘 날이 시원해지고 있어 자주 손이 간다.
오늘도 아침에 뿌렸더니 하루 종일 향기롭고 기분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