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1월 26일

프로지각러

By In DAILY

약속시간보다 30분에서 1시간 일찍 가는 게 우리 집안 룰이었다.
엄마와 동생은 기차 시간까지 한참 남았어도 옷을 미리 다 입고 계속 시계를 쳐다본다.
예를 들어 12시 기차고, 집에서 기차역까지 40분이 걸린다면, 10시부터는 미리 나가야 하는 거 아니냐며 엉덩이를 들썩들썩한다.
나도 옛날엔 그랬었던 것 같은데 언제부턴가 긴장의 끈을 놓아버린 것 같다.

엄마 카페를 도우러 매주 주말 경주에 내려가던 시기가 있었다.
돈을 아끼느라 주로 버스를 탔었는데 절대로 늦으면 안 되는 날에 큰맘 먹고 KTX를 탔다.
1년에 몇 번 안되는 대목날이었다.
대목날은 아침부터 사람이 쏟아지기 때문에 정말 늦으면 안 된다.
근데 참 야속하게도 그날 내가 너무 피곤했었나 보다.
서울에서 출발하자마자 잠들어 종착역인 부산에서 눈을 떴다.
난생처음 와본 부산역에 비몽사몽간에 내려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바보같이 겨우 자느라 계획이 다 망해버렸다.
그것도 이 중요한 날에!
내가 얼마나 서럽게 울었으면 역무원님이 경주-부산 구간 추가 비용도 면해주시고 돌아갈 차편까지 알아봐 주셨다.
(이후로도 한 번 더 부산역에 내린 이후로, 내가 경주에 내려간다고 하면 엄마가 내릴 시간에 맞춰 전화를 해주는 짠한 문화가 생겼다.
이제는 그렇게 지쳐 잘 일이 없어도 여전히 카톡을 남겨주시거나 카톡을 보지 않으면 전화를 하신다.)

별일 아닌 것 같지만 미리 해봤자 소용없고 그러니까 될 대로 돼라!는 마음이 생겼다.
당시 나에게 주말 경주행은 신념과도 같았다.
그러니 겨우 부산역에 도착한 것만으로도 오열을 했겠지.

여하튼 그 시기를 겪으며 내 인생에서 크게 지켜야 할 것들이 없어졌던 것 같다.
만사가 개의치 않아졌다.
강박적이던 면이 개선되어 좋아지기도 했지만 단편적으로는 거의 모든 약속에 몇 분씩 늦는 사람이 되었다.

근데 오늘 문득 언제나 나(와 A)를 몇 년째 기다려주는 L에게 많이 미안했다.
스페인 친구에게 미안했던 지난날의 기억도 떠올랐다.
같이 저녁을 먹기로 한 식당이 친구 집보다 사무실에서 더 가까워서 내가 먼저 식당에 도착해 앉아있는데 너무 어색한 거다.
언제나 친구가 먼저 도착해 나를 맞이해줬다는 사실에 머쓱해졌다.
이내 친구가 도착했고 내가 너를 기다린 게 처음인 것 같아서 고맙고 미안하다고 했더니 그런가?라고 대답했다.
L도 언제나 괜찮으니 천천히 오시라고 한다.
참 착한 사람들이다.

지각은 진짜 마음의 병이 맞다.
나도 이 정도 시간이 흐르니 이제 여유가 생기나 보다.
다시 잘 지켜봐야지.
소풍날 전날부터 설레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잤던 것처럼.

Written by hershey

안녕하세요 걀걀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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