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좋아하는 마음이 현실을 앞설 수 없는 사람이다.
내게 주어진 현실만큼만 좋아할 수 있다.
원룸 시절에는 절대 책 한 권을 안 샀다.
옷도 안 샀다.
나의 짐들은 코딱지만 한 풀옵션 오피스텔 붙박이장 세 칸에 모두 들어갈 정도로 콤팩트했다.
왜냐?
어차피 이사 갈 거니까.
여기서 아빠 닮은 구석이 튀어나온다.
이사 갈 건데 뭐 하러 짐을 늘리냐 이거다.
그렇게 우리 집은 한 번도 이사 간 적이 없었고, 나 역시도 한 집에서 5년 이상씩 살고 있다.
이럴 거면 그냥 하고 싶은 걸 좀 해도 되겠건만 도무지 그러지 못했다.
반면, 같이 사는 A는 모든 게 쉬운 사람이다.
덕분에 좋아하는 것 이상의 것들을 가지면서 살고 있다.
A가 밀프랩을 해야겠다고 그릇 16개를 턱하니 사서 식탁에다 펼쳐놨다.
역시 긴 시간의 단순노동은 수련과 다르지 않다.
온갖 야채와 고기를 볶고 삶는 동안, 나 혼자였다면 몇 살쯤에야 이런 삶을 살았을까와 같은 생각들이 줄줄이 소세지처럼 이어졌다.
부엌이 지금 집의 2배 정도는 되어야 할 수 있었겠다.
그러려면 한 20억 있어야 하는데.
할머니쯤 되면 그 부엌을 가질 수 있겠지.
그나저나 할머니 돼서 밀프랩 먹고 싶을까.
그러니까 A에게 물건을 처분하라고 할 게 아니라, 내가 현실을 키우는 데에 힘 쏟으면 될 일이다.